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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작은 행사 그리고 큰 박수'장기읍성 태극마크 달다'에 주목하는 이유
@이한웅

포항시 남구 장기면. 도심에서 차로 40여 분, 동해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천 년 가까운 세월을 품은 장기읍성이 나지막한 산자락 위에 앉아 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유배의 시간을 보낸 곳, 향교와 서원이 선비의 숨결을 지켜온 곳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곳은 아는 사람만 아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 장기가 요즘 달라졌다. 올해 진행 중인 '장기읍성 태극마크 달다' 덕분이다.

 

이름에 담긴 자부심

행사 주제부터 곱씹어 볼 만하다. 장기향교에는 실제로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옛 유생들이 배움의 터에 새긴 그 태극마크가 행사 이름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뜻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운동선수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것은 곧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뜻이다. 장기의 문화유산이 태극마크를 달 만큼 국가대표급이라는 자부심, 이 이름에는 그 당당한 선언이 담겨 있다.

읍성과 향교, 서원, 그리고 유배문화까지. 한 고장에 이만한 역사 자원이 겹겹이 쌓인 곳은 흔치 않다. 장기는 이미 국가대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알릴 무대가 없었을 뿐이다.

 

스스로 따낸 프로젝트, 뚜껑을 열어보니

이 행사는 국가유산청과 경상북도, 포항시가 주최한다. 하지만 출발점은 관청이 아니었다. 지역을 아끼는 사람들이 모인 '장기발전연구회'와 의욕 넘치는 문화관광해설사들이 국가유산청의 서원·향교 활용사업 공모에 직접 응모해 따낸 프로젝트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 고장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출발이다.

모두 11차례, 회차당 정원은 20여 명. 숫자만 보면 작은 행사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사정이 다르다. 회차마다 만원이다. 도심에 사는 부모가 어린아이 손을 잡고 시골 마을 장기까지 찾아와 읍성을 걷고, 향교에서 예절을 배우고, 옛 선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나절을 보낸다. 포항에 주둔하거나 훈련차 방문한 미해병대원 등 외국인 참가자들도 찾아와 한복을 입고 우리 음식을 맛보며 한국 문화를 몸으로 체험했다.

그들이 찍어 간 사진 한 장, 집에 돌아가 나눈 이야기 한마디가 포항과 장기를 알리는 홍보가 됐다. 수 천만원 예산을 들인 광고보다 참가자 스무 명의 진심 어린 후기가 더 멀리 간다. 이 작은 행사가 포항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규모가 아니라 콘텐츠다

우리는 그동안 행사의 성공을 숫자로 측정해 왔다. 몇만 명이 다녀갔는가, 무대는 얼마나 화려했는가, 유명 가수는 누가 왔는가. 그러나 대규모 일회성 이벤트가 끝나고 나면 무엇이 남았는지 되묻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언론사 이름을 내건 행사 가운데에도 현수막과 개막식만 요란할 뿐 정작 시민이 가져갈 알맹이는 없는 경우가 있다.

'장기읍성 태극마크 달다'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규모는 작지만 콘텐츠가 꽉 차 있다. 해설사들은 행사를 위해 따로 모여 공부했고,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고 돌아가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그 정성이 입소문이 되어 다음 회차를 채운다. 지역의 역사 자원이 살아 있는 콘텐츠로 바뀌는 순간이다.

 

책상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를

이제 행정이 물어야 할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어떤 행사, 어떤 기획이 필요한가. 그 답은 회의실에서 업체가 띄우는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화면 속에 있지 않다. 주말에 아이와 어디를 갈지 고민하는 부모, 한국 문화를 더 알고 싶은 외국인, 우리 동네 이야기를 알리고 싶은 주민의 목소리 속에 있다.

시민과 관광객의 관심은 이미 '보여주는 행사'에서 '함께하는 경험'으로 옮겨가고 있다. 크게 한 번 하는 것보다 작게 여러 번,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해보는 것, 스쳐 가는 것보다 기억에 남는 것을 원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절이다.

해법도 분명하다. 장기발전연구회처럼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민 조직, 현장을 뛰는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성과가 확인된 작은 행사에는 회차를 늘리고, 참가자 기록을 모아 다음 기획의 밑거름으로 삼는 꾸준한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한 번에 수억 원을 쏟는 행사 하나보다 이런 알찬 행사 열 개가 도시의 체질을 바꾼다.

장기의 문화유산은 이미 국가대표다. 이제 그 국가대표가 더 많은 시민과 방문객을 만날 수 있도록, 자치단체와 지역주민이 든든한 응원단이 되어줄 차례다.

 

 

이한웅 편집에디터  newskore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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