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흥해읍 용곡리에서 9남매의 넷째 아들이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 누이도 여럿. 농사는 자기 몫이 아니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집은 대농이었다. 대대로 만 평이 넘는 논을 지었고 머슴이 둘, 일꾼이 여럿이었다. 그런데 정작 농사를 좋아한 사람이 없었다. 큰할아버지는 학자라는 핑계를 댔고, 아버지는 신광에 서점을 내고 영농철이 아니면 논둑길도 걷지 않았다.
형 셋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잇달아 세상을 떴다. 넷째였던 그가 맏이가 됐다.
그는 도망쳤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서점을 하다 군에 갔지만 보름 만에 늑막염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포항 나루 끝에 점포를 알아보고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접었다. 흥해읍사무소 공무원으로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얼마 못 버텼다. 동생들은 학업으로 직장으로 도시로 떠났고, 부모는 늙어갔다.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엄두가 안 나던 그를 붙잡은 것은 뜻밖에도 기계였다. 1970년대 중반, 대동경운기가 나왔다. 농기구로 사흘 걸릴 일을 하루에 끝냈고, 마을에는 품삯을 주고 삯갈이를 맡기는 ‘경운기 이장’이 생겼다. 그는 경운기를 샀다. 제 논을 갈고 나면 싼값에 이웃 논도 갈아줬다. 인심을 얻었고 발언권이 생겼다. 그렇게 서서히 농사꾼이 되어갔다.
1988년, 서른아홉에 이장을 맡았다. 열다섯 해를 하고 넘겨줬다가 다시 다섯 해를 더 했다. 합쳐 스물세 해. 흥해읍 이장협의회장도 두 번 지냈다.
2017년 11월 15일 지진, 그는 이장협의회장 자격으로 영일만항 행사에 나가 있었다. 땅이 꺼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마을을 집집이 돌았다. 자식들이 도시로 떠나고 홀로 남은 노인이 많은 동네였다. 수습이 끝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마을을 벗어날 기회도 있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에 계곡물이 불어 집이 다 쓸려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집은 좁아졌고 학교는 멀었다. 그러나 부모가 계셨고, 도시로 떠난 친척들이 맡겨놓은 논이 있었다. 결국 아이들과 타협했다. 용곡리는 떠나지 않되 마을 입구에 새로 집을 짓기로. 1995년, 450평 집과 큼직한 창고가 섰다. 마당에는 남녀 화장실을 따로 만들었다. 오가는 동네 사람들이 언제든 들르라는 뜻이었다.
몇 해 전부터는 포항흥해농요보존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장롱을 뒤져 아버지가 입던 한복과 두건을 꺼내 입고 공연에 나선다. 벼가 익어가는 흥해들판은 수십 년을 봐도 지겹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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